[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⑳ 백두산·칠보산지역의 역사유적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1. 03. 06. 08:02
news.v.daum.net/v/20210306080238863
조선 후기부터 유학자와 관료들의 유람기에 본격 등장
백두산-칠보산 연계 관광 모색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고려, 조선시기에 백두산은 한반도 산천의 조종산(祖宗山)으로 불렸다. 백두산은 과거 숙신(肅愼)과 옥저(沃沮)의 땅이었다가 고구려-발해의 영역으로 귀속됐다. 발행 멸망 후 백두산은 여진(女眞)족의 활동영역이었지만 고려 때도 "아국은 백두산에서 시작해서 지리산에서 끝난다"는 산악숭배신앙이 존재했다.
조선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두만강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에 6진(鎭)을 설치하고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1712년(숙종 38)에는 청나라와 국경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졌다.
그후 영조는 청나라가 백두산(장백산)을 여진족의 발상지로 내세우는 것을 견제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고자 백두산을 조선 왕조의 발상지로 높이고, 백두산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허항령(1,402m) 동쪽 대홍단군에서 바라다 본 백두산.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국경이 확정되고 조종지산(祖宗之山)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서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기행문을 남기는 유학자와 관리들도 늘어났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 백두산에 오르려면 함경도 갑산이나 무산을 거쳤다.
1776년(영조 42) 6월 10일부터 17일가지 조엄(趙曮)과 함께 백두산을 오른 서명응(徐命膺)은 갑산-허항령-삼지연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서명응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에 따르면, 1766년 갑산(甲山)으로 유배된 그는 삼수(三水)로 유배된 조엄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동아일보에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연재한 언론인이자 사학자인 최남선(崔南善)도 갑산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다. 그는 1926년 7월 24일 기차로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원산선과 함경선을 갈아타고 속후(당시 함경선의 종점으로 현재 함경남도 신포시)에 도착, 거기에서 다시 자동차를 타고 북청, 풍산, 갑산 등을 거쳐 혜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7월 29일부터 걸어서 혜산을 떠나 허항령을 넘어 무두봉에 도착하고, 8월 3일 백두산의 정상 장군봉에 올랐다.
반면 1930년 조선일보에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연재한 사학자이자 정치가인 안재홍(安在鴻)은 원산, 청진, 부령, 무산(茂山), 두만강 기슭을 거쳐, 백두산 정상에 오른 후 허항령, 혜산, 풍산을 거쳐 북청(北靑) 해안가에 들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현재는 량강도의 도소재지이자 중국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국경도시인 혜산이 백두산 답사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육로로 가려면 평양에서 길주까지 기차로 간 후 다시 백두산청년선(길주-혜산 103.4㎞)으로 갈아타고 혜산에 도착하거나, 평양에서 만포까지 간 후 혜산-만포청년선(204.15㎞)을 통해 혜산에 간다. 2019년 10월 북한은 백두산 답사와 관광을 위해 혜산시와 삼지연시을 연결하는 철도를 새로 완성했다.
새롭게 개발되고 있는 삼지연시 전경. 뒤쪽으로 북포태산이 솟아 있고, 사진의 왼쪽 제일 위의 붉은 지붕 건물이 새로 건설된 삼지연청년역이다. 혜산-삼지연 철도는 2015년에 착공돼 2019년 10월에 완공됐다. 2021.03.06.© 뉴스1
전근대시기에 백두산은 접근이 어려운 오지였기 때문에 역사유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북한은 이 지역을 항일혁명전적지로 복원해 놓았다. 그런데 최근 북한은 장군봉과 천지 인근에서 잇달아 종교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2000년대에 천지 근처에서 발굴된 용신비각(龍神碑閣)은 국보유적 193호로 지정됐다. 용신비각은 현재 향도봉 '백두산사적비' 옆으로 옮겨져 있다.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 전경. 뒤쪽으로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의 앞면(왼쪽)과 뒷면. '천화도인'이 20세기 초에 세운 비석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용신비각은 20세기 초에 '천화도인'이 백두산의 '용왕용신'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여줄 것을 기원하며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m정도다. 앞면에는 "대태백(大太白) 대택수(大澤守) 용신비각"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대태백'은 백두산을, '대택'은 천지를 뜻한다.
뒷면에는 '지궁(地宮)'이라는 글자 아래 "용왕용신비각 청정(淸淨) 대태백 대택수중비각 래래무량안정(無量安定) 천화도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천지의 용신이 이 나라 사람들을 무궁토록 안정하게 해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북한은 '천화도인'을 대종교나 천불교 관계인물인 것으로 추정한다.
1909년 개창된 대종교는 백두산을 '배달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추앙했고, 장군봉이나 천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해 장군봉에서 대종교의 기본경전인 천부경을 새겨놓은 옥돌판을 발견해 공개했다.
또한 2018년 천지 인근에서 제단유적도 발견됐다. 이 제단은 밑면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36m정도라고 한다. 여기에는 2개의 금석문도 발굴됐는데, 그 중 하나에는 '조선왕조 초기에 이곳에서 힘을 비는 제를 지냈다'는 내용의 2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백두산 향도봉 아래 천지 인근에 있는 제단유적. 2018년에 발견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용신비각을 세운 '천화도인'을 북한이 천불교 관계인물일 수도 있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1906년에 천지 인근에 세워진 종덕사(宗德寺)와 관련이 있다. 종덕사는 장백폭포 너머 천지의 북쪽 끝인 달문 인근에 있다가 해방 후 사라진 뒤 터만 남아 있는 종교건물이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두산 천지 중국 쪽 달문 근처에 있는 종덕사(宗德寺) 전경.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1930년대 기록에 따르면 종덕사에는 "병오년(1906년) 6월 6일"이라는 준공 날자와 도목수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고, '대원당(大元堂)', '백두산 대택수 종덕사(白頭山大澤水宗德寺)'라고 쓴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내당에는 《옥황상제천불위》(玉皇上帝天佛位)라고 쓴 위패도 있었다. 종덕사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었는데 무려 99칸이나 됐다고 한다.
절간의 기본건물의 제일 가운데에는 내당이 있었고 그 둘레로 8칸, 16칸, 32칸 즉 2배씩 늘어나게 배치된 방들이 있었다. 1933년 9월 4일 종덕사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향토인(鄕土人)의 말을 빌어 종덕사가 "조선 말기 태극교도들이 창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안도현 내두산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 '천불사'란 절이 있었고,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천불교 신자였으며, 이들이 백두산 천지 가에 '덩덕궁'(종덕사)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라고 주장한다.
종덕사에서 의식을 할 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 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 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꽹과리와 제금을 치며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 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해 천불교를 '덩덕궁교'이라고 불렀다 한다.
현재로서는 '천화도인'이나 종덕사가 대종교, 태극교, 천불교 중 어느 종파와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후기에 들어서 백두산과 함께 주목을 받은 산이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七寶山, 906m)이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마천령산맥이 대정봉, 대연지봉, 간백산, 소백산, 남포태산, 북포태산, 두류산 등 2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로 이어지고, 두류산에서 남동쪽으로 점차 낮아져 김책시(옛 성진시) 해안에서 끝나는데, 두류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온 한 줄기가 칠보산으로 연결된다. 금, 은, 진주, 산호, 산삼을 비롯한 7개의 보물이 묻혀 있다 해서 칠보산이란 이름이 붙였다. 내칠보, 외칠보, 해칠보로 나뉘는 칠보산은 그 영역이 대단히 넓다.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의 모습. 괴암기봉으로 이뤄진 풍경이 이색적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조선시대 때 유학자나 관료들의 칠보산 유람문화의 서막을 연 것은 함경도 회령의 판관으로 임명된 임형수(林亨秀)였다. 그는 1542년(중종47) 3년간의 함경도 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4일간 칠보산을 유람한 뒤 <유칠보산기(遊七寶山記)>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금강산의 돌 하나와 지리산의 봉우리 하나하나마다 그 이름을 다 가지고 있거늘 어찌 기이한 봉우리와 뛰어난 바위가 이 산에서 홀로 이름 불리지를 못하는가"라며 칠보산을 금강산, 지리산에 견주었다.
1664년에는 한시각의 칠보산도 네 폭이 그려지기도 했다.
그후 17세기에 4년간 함경도 감사를 지낸 남구만(南九萬)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함흥십경'과 칠보산을 포함한 '북관십경'을 선정하고 문장을 곁들인 형식의 '함흥십경도', '북관십경도'를 제작했다. 이 그림들은 중앙의 문사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19세기까지 적지 않은 '칠보산도(七寶山圖)'가 꾸준히 제작됐다.
조선후기 칠보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칠보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발해의 사찰인 개심사(開心寺, 국보유적 제120호)가 있다. 826년(발해 선왕 9) 대원(大圓)이 창건한 사찰로, 1377년(우왕 3) 나옹(懶翁)이 중건했고 그 뒤 수차례 보수됐다. 대웅전은 1784년(조선 정조 8) 중건돼 1853년(철종 4) 대대적으로 보수된 건물이다. 현재 대웅전 외에 응향각, 관음전, 심검당, 산신각이 남아 있고, 절 입구에 3개의 부도와 3개의 부도비가 있다.
칠보산 기슭에 있는 발해의 사찰 개심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안 전경. 대웅전 안에는 조선 시기 불상인 금동11면 관음보살입상, 금동9면 관음보살입상, 비로자나불상 등이 안치되어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발해의 유적으로는 개심사 외에 함경남도 북청군에 남아 있는 청해토성(국보유적 제187호)이 있다. 이 토성은 남북 길이가 340m, 동서 길이가 500m, 둘레는 약 1,289m에 이른다. 신라와의 접경지대에 세워진 중요한 전초기지의 성으로, 현재 남벽·서벽·북벽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북한은 이 유적을 근거로 발행의 5경(京)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발해의 유적인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 남벽·서벽·북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칠보산 북쪽에 인접해 있는 화성군에는 조선 초기의 사찰인 쌍계사(雙溪寺)가 남아 있다. 1395(태조 4)년에 창건돼 1480년(성종 11)에 중수된 절로, 현재 대웅전을 비롯해 애월루, 심검당, 산신각 등의 건물이 보존돼 있다.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조선 초기 사찰 쌍계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세종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설치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백두산과 칠보산 주변지역에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산성과 읍성이 많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운두산성(雲頭山城, 보존유적 제 476호)이다. 회령의 두만강 강변에 솟은 운두산의 험한 산세를 이용해 고구려 때 처음 쌓은 운두산성은 조선시대 때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 6km이다.
읍성 중에는 명천군과 청진시 사이에 있는 경성읍성(국보유적 제118호)이 가장 잘 보존돼 있다. 이 성은 북방의 방위를 위해 1107년(고려 예종 2)에 흙으로 쌓았는데 조선 광해군 때 성의 규모를 넓혀 고쳐쌓았다. 둘레는 2260m, 성벽 높이는 9.6m이다. 네 면의 중심부에 대문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고 지금은 남문(국보유적 제119호)만이 원상태로 남아 있다. 수성문(守城門)이라고 불린 경성읍성 남문은 조선 중기에 축조됐고, 1756년(영조 32) 성벽 사이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문루를 세웠다.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성곽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남문과 문루. 조선 영조 때 세워진 건축물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경성에는 고려 때 이 지역을 개척한 윤관(尹瓘)과 조선시대 4군6진을 개척한 김종서를 비롯한 4명의 장군들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정북사(靖北祠, 보존유적 제437호)가 남아 있다. 이 사당은 조선 세종 때 세워진 것으로 처음에는 노당(盧堂)이라 했고, 여러 차례 보수와 중수를 거듭하다가 1845년(헌종 11)에 중건하면서 정북사로 개칭됐다.
1664년(현종 5)에 실시된 과거시험인 북관별시를 묘사한 '북관별과도(北關別科圖)'에 포함돼 있는 길주성과 관아의 모습. 위쪽에 장백산(백두산)과 마천령산맥이 묘사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경성읍성 외에도 고려 때 처음 쌓은 길주읍성(보존유적 제451호), 조선 초에 쌓은 혜산진성(보존유적 제1514호) 등 현재 68개의 성곽 유적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특히 혜산진성(현재 혜산)의 남문은 외적들을 제압하여 복속시킨다는 의미에서 복융대(伏戎臺)라고 하다가 17세기에 고쳐지으면서 괘궁정(掛弓亭)으로 개칭했는데, '북관십경도'에도 포함돼 있다. 조선시대 때 혜산진은 갑산부에 속했다. 갑산읍성의 남문(진북루)은 현재 국보유적 제157호로 지정돼 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관북십경도' 중의 '갑산 괘궁정' 그림에 묘사된 혜산진성과 백두산 천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2021.03.06.© 뉴스1
갑산읍성의 남문인 진북루 전경. 현재 건물은 1980년에 복원한 것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또한 함경북도의 최북단 온성군에 있는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受降樓, 제436호)는 북한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3층 목조건물이다. 1608년(선조 41)에 성을 개축하면서 세워졌고, 여진족을 물리치고 우두머리를 잡아 이곳에서 항복을 받았다고 하여 수항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의 건물은 해방 후에 복구된 것이다. 통영시에도 왜군의 항복을 받았다는 수항루가 복원돼 있다.
조선 중기 때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3.06.© 뉴스1
북한은 백두산과 칠보산지역을 연계해 국제관광지로 개발하고 있다. 백두산지역에는 '무봉국제관광특구'가 조성됐고, 백두산 아래 첫 도시인 삼지연시 개건 현대화사업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또한 북한은 2013년 개성역사지구를 고구려고분군에 이어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뒤부터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의 중요성을 부쩍 강조하며 국제기구와 다른 나라들과 교류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15년 민족유산보호법을 세계적 추세에 맞게 새로 제정하고, 2018년에는 문화유산·자연유산 보호 사업을 위해 국내외에서 기부를 받아 운영되는 ‘조선민족유산보호기금’도 설립했다.
남북 간에는 문화유적 보존, 공동발굴, 상호 교환전시, 공동학술대회 등 교류의 폭을 넓혀갈 수 있는 사업들이 많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상호협조 및 문화재의 해외유출 방지, 해외소재 문화재의 환수, 일본의 교과서 왜곡 및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공동 대응 등 대외적인 문제에서도 남과 북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특히 문화유산 분야의 교류는 남북의 오랜 분단의 이질감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데도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막혀있을수록 문화유산을 매개로 한 남북교류는 정책적으로 확대해 나가야 한다. 역사문화유산 교류가 남북의 다름을 이해하고 소통하는데 가장 좋은 창구인 동시에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북한 유적들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들 인것입니다.
백두산 향도봉으로 옮겨져 있는 용신비각(龍神碑閣)의 앞면(왼쪽)과 뒷면. '천화도인'이 20세기 초에 세운 비석이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신비각(龍神碑閣)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들 인것입니다.
용신비각은 20세기 초에 '천화도인'이 백두산의 '용왕용신'에게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구원하여줄 것을 기원하며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는 약 1m정도다. 앞면에는 "대태백(大太白) 대택수(大澤守) 용신비각"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대태백'은 백두산을, '대택'은 천지를 뜻한다.
"대태백(大太白) 대택수(大澤守) 용신비각"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대태백'은 백두산을, '대택'은 천지를 뜻한다?
"대태백(大太白) 대택수(大澤守) 용신비각(龍神碑閣)"
대태백(大太白)?
큰 뜻大이 태太 글자속에 있으니 밝게白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태太?
한문을 파자하면...
잘난 너 땅(ㅡ)에서 살아갈려면 죽음을 깨닫고,죽음을 벗어나는 방법이 물속에 있으니 물을 깨닫고,물에서 살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천화도인)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택수(大澤守)?
잘난 너를 지키고(방어하고) 살아갈려면 큰뜻大이 澤못 택,못속에 물을 보고 물을 깨닫고,물에서 살며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천화도인)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못
넓고 깊게 팬 땅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
용신비각(龍神碑閣)?
잘난 너를 삶閣과 죽음碑을 깨닫고 죽어서 귀신神 돼지 말고 용龍이 물에서 하늘로 승천하듯,잘난 너도 물에서 살며 용龍처럼 승천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천화도인)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백두산 향도봉 아래 천지 인근에 있는 제단유적.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단유적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제단유적을 보고,삶과 죽음을 깨닫고 죽음을 방어 하고 살아가는것을 깨닫고,죽음을 방어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천지天池 물속에 있으니 물을 깨닫고 물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재단유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백두산 천지 중국 쪽 달문 근처에 있는 종덕사(宗德寺) 전경.
1930년대 기록에 따르면 종덕사에는 "병오년(1906년) 6월 6일"이라는 준공 날자와 도목수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고, '대원당(大元堂)', '백두산 대택수 종덕사(白頭山大澤水宗德寺)'라고 쓴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내당에는 《옥황상제천불위》(玉皇上帝天佛位)라고 쓴 위패도 있었다. 종덕사 건물은 모두 나무로 지었는데 무려 99칸이나 됐다고 한다.
절간의 기본건물의 제일 가운데에는 내당이 있었고 그 둘레로 8칸, 16칸, 32칸 즉 2배씩 늘어나게 배치된 방들이 있었다. 1933년 9월 4일 종덕사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향토인(鄕土人)의 말을 빌어 종덕사가 "조선 말기 태극교도들이 창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 안도현 내두산에 있는 조선인 마을에 '천불사'란 절이 있었고,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천불교 신자였으며, 이들이 백두산 천지 가에 '덩덕궁'(종덕사)이라는 99칸짜리 절간을 지어 일 년에 두 번씩 찾아가 기도를 드렸다라고 주장한다.
종덕사에서 의식을 할 때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고구려 사람들처럼 머리를 우로 틀어 올리고 울긋불긋한 옷차림을 하고 꽹과리와 제금을 치며 북과 목탁을 두드렸는데 덩덕궁 덩덕궁하는 소리가 아주 장엄해 천불교를 '덩덕궁교'이라고 불렀다 한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덕사(宗德寺)는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종덕사(宗德寺) 없어진것을 보고,살아있을때는 꽹과리와 제금을 치며 북과 목탁을 두드리고 덩덕궁 덩덕궁 딩가~딩가~ 하고 살아가나,세월가면 모두 사라 지는것을 깨닫고,삶과 죽음을 깨닫고 죽음을 방어 하고 살아가는것을 깨닫고,죽음을 방어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천지天池 물속에 있으니 물을 깨닫고 물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종덕사(宗德寺)"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덕사宗德寺?
잘난 너 절寺이 죽음宗(제사)을 깨닫고 죽음을 벗어나 살아 가는것을 깨닫고 살아가라는 덕德을 베플고 있는 것이니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종덕사(宗德寺)" 이름으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의 모습. 괴암기봉으로 이뤄진 풍경이 이색적이다.
칠보산七寶山?
잘난 너 산山을 보고 죽음을 깨닫고 죽음을 벗어나 살아 가는것을 가리키고七 있는 보배로운寶 산이니 깨닫고 잘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칠보산七寶山" 이름으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http://blog.daum.net/mbbbk/7969341 지질의 보물창고 단양..확인된 석회암 동굴만 181개 (클릭)
칠보산 기슭에 있는 발해의 사찰 개심사 전경
개심사開心寺?
잘난 너 절寺이 마음 심心 글자를 열고開 살아 가는것을 가리키고 있는 절寺이니 깨닫고 잘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개심사開心寺" 이름으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 심 心
파자를 하면...
잘난 너 죽음(ㄴ)을 벗어나는 방법이 물속에 있으니 물을 깨닫고 팔팔(八)하게 잘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발해의 유적인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 남벽·서벽·북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해토성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신神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청해토성을 보고 죽음(전쟁)을 깨닫고 죽음을 지키고(방어하고) 살아 가는것을 깨닫고 잘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신神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함경북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경성읍성 성곽 전경
조선 중기 때 종성읍성의 장대로 세워진 수항루 전경.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항루 受降樓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신神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수항루 受降樓?
잘난 너 수항루 受降樓 루樓를 보고 죽음(전쟁)을 깨닫고 죽음을 항복降 받고受 살아 가는것을 깨닫고 잘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신神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것입니다.
칠보산 기슭에 있는 개심사 대웅전 안 전경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웅전은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 하는 식물로서,물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우리들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오른손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인것은,삼십년에 세월을 실행하라는 것이고,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오랜 세월 동안 메세지를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오(좌욕).
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오전,오후30분이상 매일 실행 하십시오.
젊어서부터(20代)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불행에서 벗어나 살아 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도 아니고 종교는 무슨 종교?
종교라는것은 없습니다.
종교가 선량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범죄를 저질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종교는 잘 이해되지 못한것을 모르고,잘 이해 된것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이며,오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관습화 하여 문화 화 하고 우리 일상생활에서 행하여진 것이기에,선입관,판단력의 부족,사고력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고 종교에 빠져 살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아,
종교라는것은 없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문맹의 일반인들은 글을 봐도 읽을수도 없었고 뜻도 알수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무엇을 알겠어요?
무지 無知
1.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
2.미련하고 어리석음.
옛날에 종이와 붓이 흔하지 않던 시절 선지식인분이 계셨는데,자신의 지식을 말을 해 줘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자신의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傳 해야 하는데 전傳 하는 방법이 없다 보니 문화,풍속,종교,건축물,조형물(불상),이름 등으로 메세지를 주고 보고 깨닫고 살아 가라고 전傳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런 모습을 하고 살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것이 선지식인분께서 후손들을 공부 시키는 방법 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대한민국 과 세계에 글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문맹들이 많습니다.
당신 스스로 눈을 뜨고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단의 구름 문양?
잘난 너 이런 사실들을 깨닫고 신선神仙이 돼어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오랜 세월동안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DNA는 끊임없이 손상된다.
우리 46개의 염색체 각각은 DNA를 복제할 때마다 하루에 2조번 넘게 끊긴다.
거기다 자연 방사선, 화학물질, 병원의 엑스선과 CT에도 끊긴다.
문제는 후성 유전인자가 이 손상을 복구한 뒤 원래 유전체로 돌아가지 않는 데 있다.
그러면서 엉뚱한 때와 장소에서 엉뚱한 유전자가 켜지며 그 결과 세포는 정체성을 읽고 기능 이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혼란을 저자는 ‘후성 유전적 잡음’이라 부른다.
그는 피아니스트(후성유천제)가 그랜드 피아노(유전체)의 건반(유전자)을 실수로 계속 잘못 눌러 연주회를 망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후성유전적 잡음이 우리가 늙고 병드는 이유이자 갖가지 노화의 징표가 나타나는 원인이다.
DNA는 끊임없이 손상된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몸안에 노폐물(똥)을 빼내는 방법입니다.
손상된 DNA를 회복 시키는 방법 입니다.
몸안에 노폐물(똥)을 빼내면,몸이 회춘 과정을 겪어 점점 젊어져 20대로 다시 돌아 가게 돼는 것입니다.
그래서,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면,건강을 지킬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 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물에 앉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죽는것도 못 죽겠다고 해서 않 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모든 병든자,장애인분은 현대 의학의 가장 적합한 치료 방법과 병행해서 실행 하십시오.
인연이 있으면 기쁨이 있게 될것입니다.
정상인 처럼 생활 할수있게 될것입니다.
실행과 극복 없이 기쁨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니 모두에게 꼭 좋은일이 있다고 말씀 드릴수는 없으나,인연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실행하며 살아 가십시오.
늙으면 병들고 고통..
나이들어서 질병의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20代) 정신 차리고 건강을 지키고 살아가야 합니다.
단,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얻을수 없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 없습니다.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냥 살다가 죽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안 먹고 사는 사람은 물에 안 앉아도 됩니다.
그러나,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냥 살다가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먹고 사는 사람은 물에 앉으며 살아야,건강을 지키고 살아갈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자신 건강을 지키고 살면,돌아 댕길 일도 없고,돌아 댕기질 안으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http://blog.daum.net/mbbbk/7968682 "그냥 사라지고 싶다"..칼 라거펠트, 유지 따라 장례식 없이 화장 (클릭)
보통 대장 용종은 50대 이상 남성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변정식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대장 용종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그 발생 빈도가 늘어난다"며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성별에 따라 발생률에도 차이가 나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1.5~2배 정도 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어 그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상이 없고 특별한 질병이 없는 건강한 40대 10~20%, 50대 20~30%, 60대 이상부터는 30~60%까지 선종성 용종이 발생한다"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나이들면 누구도 외로움,질병,늙음,죽음에서 벗어날수 없고,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 건강 지키며 살아 가야 합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오(좌욕).
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오전,오후30분이상 매일 실행 하십시오.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젊어서부터(20代)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40-50대에서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불행에서 벗어나 살아 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一神 일신
천존天尊
천주天主
하느님,하나님,하늘(天)님
알라
世尊 세존
弥師訶미사가(메시아),弥 동자(同字)彌
彌勒미륵 말씀!
기독교에서 말하는 '메시아'라든가 불교의 '미륵'이 동일한 어원 '미트라(태양신)'에서 유래하였다.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Maitreya)' 라는 말은 본래 '미트라(Mitra)'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미트라는 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 태양신이다.
하나님,하늘님
하나님, 조선-태양의 나라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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