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와 관련된 글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히스토리텔러 기자 입력 2022. 08. 09. 05:00 수정 2022. 08. 09. 06:52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자리집고 있는 양주 회암사터 항공사진. 발굴결과 산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서 70여개 동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 현장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았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가 버티고 있다. 회암사터이다. 산의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 그대로 노출된 70여기의 건물터와 함께 그곳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기념물까지…. 사적으로 지정된 구역만 1만여평(3만3391㎡)에 이르는 절터에 서면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회암사 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양녕대군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야기다.

양주 회암사터. 효령대군이 머문 사찰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들판에서 잡아온 짐승들을 절간에서 굽자 효령대군이 “절간에서 무슨 짓이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고 응수했다.|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회암사 복원도. 목은 이색의 ‘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고 기록하고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세종대왕 3형제의 유쾌한 일화를 전하는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12세기부터 존재했던 사찰이었다.

다만 인도 승려인 지공 선사(?~1363)의 감화를 받은 제자 나옹(1320~1376)이 1374년 중건불사를 했다는 기록이 이색(1328~1396)의 <목은시고>에 실려있다.

 

“지공 스님이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나옹(지공의 수제자)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602?~664)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회암사는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불교의 종파) 사원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차이점이 있다. 선종에서는 부처를 모시는 불전, 탑보다 현신의 부처인 주지의 공간인 방장과 수행 공간인 승당, 중료 등이 핵심시설이며, 수행 공동체 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이 사원의 마지막 졸업생이었던 지공은 원나라를 거쳐 1326년 3월부터 2년7개월 동안 고려에 머문다. 고려 백성들은 “석가모니가 환생해서 고려땅에 왔으니 어찌 뵙지 않겠느냐”고 추앙했다. 지공 스님은 “천보산 자락이 (어릴 적 수학했던) 나란타사의 지형과 비슷하다”면서 “‘삼산 양수간(三山兩水間)’에 있는 회암사를 중창하고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고 제자(나옹)에게 전했다.(1357년) 회암사는 삼산(삼각산)을 안산으로, 양수(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야말로 ‘삼산양수간’인 것이다.

나옹의 주도로 시작된 회암사의 중창불사는 1374~76년 사이에 이뤄졌다. 중창 1년 뒤인 1377년(우왕 3) 이색이 남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는 262칸이나 되는 사찰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회암사와 관련된 삼화상. 나옹 스님이 “천보산 자락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일어난다”는 스승인 지공 스님의 말에 따라 회암사를 중창했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석했다.

“보광전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 5칸이 있으며 그 뒤에는 사리전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

그러면서 이색은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실제로 1376년 4월 열린 회암사 낙성식에는 감당할 수 없을만큼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들었다.

 

“…전국의 백성들이 포백(布帛·삼베와 비단)·과일·떡 등을 가지고 가서 바쳤다. 앞다퉈 들어오려고 절 문이 메워질 정도였다. 즉시 부녀자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관문을 닫으라고 했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고려사>)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고려 조정은 나옹 스님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죄’로 경상도 밀성(밀양)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그러나 나옹 스님은 유배지로 가는 도중 여흥(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다.

회암사는 인도의 고승 지공스님이 수학한 나란타사를 본따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회암사의 지세가 천축의 나란타사와 같다고 제자(나옹)에게 말해 이곳에 회암사를 창건하게 했다는 것이다. 지공이 언급한 ‘나란타사’는 인도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와 학문의 요람이었다. 631년 이곳을 찾았던 당나라 고승 현장법사는 “상주하는 승려가 1만 명, 교수가 2,0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유네스코 잠정목록인 이유

최근 14세기말, 즉 나옹의 주도로 중창한 회암사 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잠정목록 등재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다. 최소 1년 이상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세계유산등재를 위한 신청 자격이 부여된다. 회암사터는 과연 어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세계유산 등재의 핵심조건)’가 있다는 걸까. 문화재청과 양주시 등은 이 유적이 ‘14세기 동아시아에 만개했던 불교 선종 문화의 번영과 확산을 증명하는 탁월한 물적 증거’라는 점을 꼽았다. 즉 회암사는 선종 사원이다. 선종은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종파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다르다. 따라서 선종 사원의 핵심시설은 부처를 모시는 불전과 탑보다는 ‘현신의 부처’인 주지 스님의 공간(방장)과 수행공간 등이다. 회암사가 바로 ‘14세기 수행공동체 위주로 조성된 선종 사원의 모델’이라는 점이 세계유산 등재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다.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경에 매달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체취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치에만 시선을 두고싶지 않다. 양녕대군 일화가 보여주듯 회암사에는 너무나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그런 어려운 불교 사원 이야기만 하겠는가.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마디로 태조 이성계(1392~1398)가 1394년 회암사 보광전을 ‘무학대사와 총애하는 신덕왕후, 그리고 세자 방석을 위해’ 호화롭게 꾸몄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명문에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로 등장하는 ‘환관(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이득분과 관련된 심상치 않은 기록이 보인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가 중병이 들자 이득분의 집에 머물며 치료를 받았고, 결국 4일만에 그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태조실록> 기록(1396년 8월9·13일)이 심상치 않다. 환관 이득분이 태조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득분은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인 방석(세자·1382~1398)과 방번(1381~1398)의 후원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득분의 기세도 강씨가 서거하고(1396년), 1차 왕자의 난(1398년)으로 방석과 방번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후 꺾이고 만다. ‘외방종편(죄인의 의사에 따라 서울 이외의 지방에 거주하게 하는 제도)’의 처분을 받게된 것이다.

 

<정종실록>은 “1399년(정종 2) 3월1일 이득분이 불사를 행하도록 임금(태조)에게 권하여 국고를 탕진하게 만들었으니 죄를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상소를 기록한다. 이득분에게 회암사 보광전을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꾸민 죄를 물은 것이다.

회암사터에서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위상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청기와는 물론이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수막새와 임금의 상징인 봉황문 수막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회암사가 또하나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양주 시랍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목 잘리고 토막난 불상의 정체는?

회암사터에서는 또 한가지 의미심장한 발굴 결과가 드러났다.

 

발굴 현장 곳곳에서 때로는 짓이겨져 부서진 채, 혹은 머리가 무참히 잘린 채 몸통은 이쪽, 머리는 저쪽으로 흩어진 불상들이 수습된 것이다. 예컨대 동자상은 네 토막으로 잘린 채 발견됐는데 각각 반경 50~60m 떨어진 채 확인됐다. 몸뚱이는 5단지, 머리는 6단지, 팔과 다리는 7단지와 8단지, 뭐 이런 식으로 흩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누군가 불타는 적개심으로 불상들을 훼손시켜 사정없이 내던졌다는 뜻이 아닐까.

대체 회암사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고려말 선승들의 수행 공간으로 중창된 회암사는 조선 개국과 함께 위상이 달라졌다.

 

이곳은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대사(1327~1405)가 머물던 사찰이었다. 태조 역시 회암사에 자주 들렀다.

태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1402년(태종 2)에는 아예 회암사 안에 궁실을 지어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다 무학대사가 입적하고(1405년) 태상왕인 태조가 승하(1408년)한 뒤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회암사터에서 확인된 높은 위상의 유물들. 궁궐 건물에 걸맞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이 아니던가. 불교와 회암사를 지탱해온 두 사람이 사라지자 억불(抑佛)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1434년(세종 16)4월10일 회암사에서 문제가 생겼다. 태종 부인인 원경왕후(1365~1420)의 수불(繡佛·자수로 부처나 보살을 표현)이 걸려있던 보광전의 수리를 핑계로 대대적인 축하 법회를 연 것이다. 무엇보다 행사를 열면서 왕실과 사족 부녀자들로부터 막대한 시주를 받은 것이 물의를 빚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행사에 참석한 부녀자 들이 “시주를 한다”면서 승려들의 무애희(불교의 악극) 때 옷을 벗어 주고, 심지어 승방에서 여러날 머물며 숙식을 했던 일이 드러났다. 참석자 가운데는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어머니인 안씨(?~1444)까지 끼어있었다. 이 때문에 회암사의 불사를 비판하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이때 효령대군이 나서 “문제삼지 말아달라”고 요청하는 등 설왕설래하다가 일반 사대부 여인들만 처벌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후 50년이 지난 1484년(성종 15) 9월 9일에는, 승하한 정희왕후(1418~1483)의 국상 중에 종친과 저자의 부녀자 150여 명이 회암사에서 악기를 울리며 불공을 드리고 유숙까지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사헌부가 나서 처벌을 요구했지만 성종은 “무식한 회암사 주지가 무엇을 알겠는가. 그냥 두라”고 봐줬다.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백자 인물상과 용문양 암막새. 사찰 건물이 궁궐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노비 혁파 후 토지 하사

심한 억불책을 쓴 임금들마저 회암사에 관한한 관대한 처분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고, 태종의 능침사(왕릉을 수호하는 절)로 지정되었으며, 효령대군(세종)과 인수대비(1437~1504·성종)의 비호까지 받았던 사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419년(세종 1) 11월 27일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태종이 회암사에서 일어났던 스님들의 여자종 능욕사건을 거론했다. “회암사 중들이 부녀자(여자 종)들과 가까이 있는데, 어찌 여자종들을 범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왕은 사찰이 부리고 있는 노비들을 혁파하는 극강의 억불책을 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9일 <세종실록>에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하루 아침에 사찰의 노비를 혁파했다. 중들이 ‘이젠 사찰의 땅까지 없애려 하는건가’하고 걱정할 것 같다. 불교를 물리치려고 하지만 갑자기 다 없앨 수는 없다. 회암사 같은 이름난 절에는 땅을 더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게 좋겠다.”

 

사찰의 노비를 혁파해놓고 좀 미안했던지, 회암사에 전토를 더 얹어 주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그래도 여노비 능욕사건을 일으키는 사찰에 그런 은전을 베풀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회암사는 임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만큼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던 사찰이었던 것이다.

회암사 보광전 모서리에서 청동금탁이 출토되는 순간. 회암사가 어느날 갑자기 폭삭 무너져 내렸음을 암시하고 있다.|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쓸모없고 못난 선비’라 욕설 퍼부은 세종

유생들은 끊임없이 불교와 회암사의 폐단을 거론했지만 소용없었다. 임금들은 조종(祖宗)의 유습이라든가, 종실의 효성이라고 하면서 유생들의 입을 막았다. 세종은 한술 더 떴다. 부인(소헌왕후)의 승하(1446년) 이후 잇달아 불사를 추진한다. 아들(수양대군)을 시켜 <석보상절>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게 하고, 손수 <월인천강지곡>을 찬술했으며, 철폐했던 내불당을 다시 건립했다.

 

세종은 불사를 극력 반대하던 조정 유신들에게 ‘쓸모없는 선비(迂儒)’, ‘못난 선비(竪儒)’라며 욕설까지 퍼부었다.

 

세조의 경우 “나는 비록 불교를 믿지만 재물을 손상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뒤의 임금도 나를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여긴 성종은 할머니인 정희왕후(1418~1483)와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신앙생활을 어쩌지는 못했다. 1492년(성종 23) 도첩제 자체를 폐지하여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아버린 성종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교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산조각 난채로 발견된 불상들. 아마도 유생들이 절을 불태우면서 마구 훼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요승 보우의 업적은 휴정·유정대사 발탁

억불의 물결 속에도 나름 건재했던 회암사는 연산군(1494~1506)의 폐불로 위축됐다가 다시 살아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 덕분이었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1509~1565)는 불교의 세속적 권리를 회복하려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했다.

 

그런데 이 승과 부활은 문정왕후와 보우의 간과할 수 없는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냐. 1552년(명종 7)의 제1회 승과에서 휴정(서산대사·1520~1604)이, 1561년(명종 16)의 7회 승과에서 사명(1544~1610)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정은 어떤가. 역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귀국하기도 했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1610년(광해군 2) 입적한 유정을 위한 제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롭다.

 

“슬프다. 길고 짧은 것을 대보면 모두가 같고…유교와 불교가 어찌 다르랴, 오직 그 진리를 보전하여 마침내 세상에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이덕형의 <한음선생문고> ‘제송운문’)

 

성리학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이덕형이 승려를 위해 제문을 쓴 것도 파격이지만 “유교와 불교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설파한 것 역시 예사롭지 않다. 문정왕후와 보우가 승과를 부활시키지 않았다면 휴정과 유정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급제한 휴정과 유정대사. 두 분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폭삭 내려앉은 절터

그러나 두 사람의 불교 중흥의 꿈은 금방 산산조각난다. 보우는 순회세자(1551~1563·명종의 첫아들)가 13살의 나이에 요절하자 “복을 기원해야 한다”면서 회암사 무차대회를 기획한다.(1565년)

 

쇠락해가는 불교세력을 확장하고 왕실의 후원을 얻기 위한 행사였다. 무차대회는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잔치를 벌이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행하는 불교의례를 가리킨다.

 

그러나 “전국에서 승려들이 수천명 몰려오고 있고, 그 행사가 너무 화려하다”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친다.

 

공교롭게도 문정왕후가 행사 도중 병환을 얻으면서 무차대회 또한 중지된다.(4월5일)

 

그러나 문정왕후는 결국 승하하고 만다. 이후 보우와 회암사는 유생들의 공적이 된다.

 

1년 여 뒤인 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은 심상치않는 기사 2건이 보인다.

 

“문정왕후 승하 이후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가 제주 목사(변협·1528~1590)에게 주살 당했다”는 내용과,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내용 등이다. 회암사가 정말로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후인 1595년(선조 28) 6월4일 “회암사 옛 터에 불탄 큰 종이 있다”는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어떤가.

 

회암사터에서 왜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채 흩어져 있었는지 어렴풋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회암사명 약사여래삼존도’(보물). 1565년(명종 20) 중종 계비 문정왕후(1501~1565)가 명종의 만수무강과 왕비의 후손탄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400점의 불화 중 하나이다. 회암사의 낙성에 맞춰 조성된 것이다. 문정왕후가 발탁한 보우 스님이 쓴 화기(畵記)에 따르면 당시 석가약사·미륵·아미타불 등 모든 부처와 보살을 소재로 하여 금니화(金泥畵)와 채색화(彩色畵) 각 50점씩 조성했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제 회암사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랐으니 얼마 있으면 정식으로 등재될 가능성이 커졌다. 종교시설 뿐 아니라 각종 스토리가 차고 넘치는 회암사의 가치를 찾기를 바란다.(이 기사를 위해 김종임 양주회암사지박물관 학예연구사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히스토리텔러 기자 lkh0745@naver.com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가 버티고 있다.회암사터이다.산의 아래쪽 계곡에 차곡차곡 쌓은 8개의 석축 위에 그대로 노출된 70여기의 건물터와 함께 그곳에서 활약한 고승들의 기념물까지…사적으로 지정된 구역만 1만여평(3만3391㎡)에 이르는 절터에 서면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기 양주 천보산(423m) 자락에 고색창연한 절터 아래 회암사檜巖寺는 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회암사檜巖寺? 

 

잘난 너 600년의 시공을 초월한 절터를 보고,절寺이 생명檜과 죽음巖을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회암사檜巖寺" 이름으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이름 인것입니다.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풍경에 매달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체취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종교적인 가치에만 시선을 두고싶지 않다. 양녕대군 일화가 보여주듯 회암사에는 너무나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는데 그런 어려운 불교 사원 이야기만 하겠는가.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금부터 22년 전인 2000년 5월로 돌아가보자. 당시 절터를 발굴 중이던 경기도박물관 조사단원의 눈에 심상치 않은 유물이 잇달아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중심건물인 보광전터의 두 모서리에서 명문 청동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라는 뜻의 명문내용이었다.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 134자를 검토하던 조사단은 이 금탁이 여느 풍경과 다르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됐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홍무 27년(1394)’이라는 제작연대까지 보였다.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천보산 중턱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

 

처마의 네 귀의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 또는 그 부분의 처마. | 처마의 네 귀의 기둥 위에 끝이 위로 들린 크고 긴 서까래. 또는 그 부분의 처마.

 

법주사 팔상전

 

 

월정사

 

수원 화홍문 추녀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은 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을 보고,바람에 흔들리며 소리을 내는 금탁(풍경) 처럼 소리를 내고(죽지 않고) 살아갈려면 "물(물고기)과 삼각주(삼각산,추녀)"를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 으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잡히면 죽어" 신지, 김종민·빽가에 '분노'..24년째 그대로 (안다행)[전일야화]

https://blog.daum.net/mbbbk/7970027(클릭)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 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회암사檜巖寺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을 보고,죽음을 깨닫고 죽음울 벗어나 살아가는것을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 조상님중에 선지식인분께서 "회암사檜巖寺 태조 이성계의 사찰에서 사지가 찢긴 불상" 으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옛날에 문맹의 일반인들은 글을 봐도 읽을수도 없었고 뜻도 알수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무엇을 알겠어요?

 

무지 無知
1.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
2.미련하고 어리석음.

 

옛날에 종이와 붓이 흔하지 않던 시절 선지식인분이 계셨는데,자신의 지식을 말을 해 줘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자신의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傳 해야 하는데 전傳 하는 방법이 없다 보니 문화,풍속,종교,건축물,조형물(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름 등으로 메세지를 주고 보고 깨닫고 살아 가라고 전傳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것이 선지식인분께서 후손들을 공부 시키는 방법 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시대에도 대한민국 과 세계에 글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문맹들이 많습니다.

 

당신 스스로 눈을 뜨고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아,

 

우리 조상님의 지혜와 지식은 존경과 감탄을 금禁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금동여래입상과 관음보살좌상

 

인간과 짐승이 다른것은 양심과 정의,윤리와 도덕을 지키고,자비와 사랑으로 살아갈때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심과 정의,윤리와 도덕도 없고,자비와 사랑도 없이 사는건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 사는 삶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자비를 말씀하신 이유 입니다.

 

慈悲자비
1.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고,서로 사랑으로 위하며 살아 가는것을 깨닫고,인간이 돼어 살아 가라는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상은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조형물 인것입니다.

 

 

불상의 비밀?

 

불상은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조형물 인것입니다.

 

잘난 너 연꽃이란 물에서 수생 하는 식물로서,물을 상징 하고 있는 것으로,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부처는,우리들에게 물을 깔고 앉으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오른손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인것은,삼십년에 세월을 실행하라는 것이고,이마에 빛나는 보석은 그렇게 실행하면 깨달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오랜 세월동안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 불상,사찰은 철거하고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오(좌욕).

건강을 지킬수있습니다.오전,오후30분이상 매일 실행 하십시오.

 

http://blog.daum.net/mbbbk/7962111 불상과 부처님의 실제 사진과는 무엇이 틀릴까요? (클릭)

 

 

옛날에 문맹의 일반인들은 글을 봐도 읽을수도 없었고 뜻도 알수가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지無知한 사람들이 무엇을 알겠어요?

 

무지 無知
1.아는 것이나 지식이 없음
2.미련하고 어리석음.

 

옛날에 종이와 붓이 흔하지 않던 시절 선지식인분이 계셨는데,자신의 지식을 말을 해 줘도 알아 듣지를 못하니,자신의 지식을 후손들에게 전傳 해야 하는데 전傳 하는 방법이 없다 보니 문화,풍속,종교,건축물,조형물(네 모서리 추녀 끝에 매단 금탁(풍경),이름 등으로 메세지를 주고 보고 깨닫고 살아 가라고 전傳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우리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

 

 

 

 

 

 

 

오마이뉴스
법흥사터 초석 앉아 불교계 참담? 현장 가봤더니

https://news.v.daum.net/v/20220408193614354 (클릭)

 

이런 모습을 하고 살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것이 선지식인분께서 후손들을 공부 시키는 방법 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님의 깊은 지식과 지혜는 존경과 감탄을 금禁 할수가 없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대한민국 과 세계에 글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문맹들이 많습니다.

 

당신 스스로 눈을 뜨고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아,

 

원시시대도 아니고 종교는 무슨 종교?

 

종교라는것은 없습니다.

 

종교가 선량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범죄를 저질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종교는 잘 이해 되지 못한것을 모르고,잘 이해 된것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이며,오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관습화 하여 문화가 돼고,우리 일상 생활에서 행 하여진 것이기에 삶의 일부분이 되어,선입관,판단력의 부족,사고력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고 종교에 빠져 살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사실을 알았으니,無知蒙昧무지몽매에서 눈을 뜨고 깨어나 살아가야 합니다.

 

無知蒙昧무지몽매
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

 

 

석가는 노병사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출가를 했는데,무슨 명상,화두,참선,선 수행을 한다고 앉아 있나요?

 

이뭣고 놀이만 하고 앉아 있다가는 저승길 가는것 뿐이 없습니다.

 

 

 

종교와 단체에 속하지 마세요!

 

네가 믿는 종교와 단체를 버려야,잘난 너가 살수있는 길 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종교는 잘 이해 되지 못한것을 모르고,잘 이해 된것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이며,오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관습화 하여 문화가 되고,우리 일상 생활에서 종교가 삶의 일부분이 돼어,선입관,판단력의 부족,사고력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고 종교에 빠져 살다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DNA는 끊임없이 손상된다.

 

우리 46개의 염색체 각각은 DNA를 복제할 때마다 하루에 2조번 넘게 끊긴다.

 

거기다 자연 방사선, 화학물질, 병원의 엑스선과 CT에도 끊긴다.

 

문제는 후성 유전인자가 이 손상을 복구한 뒤 원래 유전체로 돌아가지 않는 데 있다.

 

그러면서 엉뚱한 때와 장소에서 엉뚱한 유전자가 켜지며 그 결과 세포는 정체성을 읽고 기능 이상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 혼란을 저자는 ‘후성 유전적 잡음’이라 부른다.

 

그는 피아니스트(후성유천제)가 그랜드 피아노(유전체)의 건반(유전자)을 실수로 계속 잘못 눌러 연주회를 망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후성유전적 잡음이 우리가 늙고 병드는 이유이자 갖가지 노화의 징표가 나타나는 원인이다.

 

 

DNA는 끊임없이 손상된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요(좌욕).<==몸안에 노폐물(똥)을 빼내는 방법입니다.

손상된 DNA를 회복 시키는 방법 입니다.

몸안에 노폐물(똥)을 빼내면,몸이 회춘 과정을 겪어 점점 젊어져 20대로 다시 돌아 가게 돼는 것입니다.

그래서,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면,건강을 지킬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오전,오후30분이상 실행 하며,매일 습관을 들이는것이 중요합니다.

매일 물에 앉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좋으며,1분1초라도 더 물에 앉으면 자신에게 좋은 것이나, 힘이들때는 쉬어가면서 하세요)<==이것도 못해 먹겠다고요?

 

아픈것도 못 아프겠다고 해서 않 아플수 있으면 좋으련만,죽는것도 못 죽겠다고 해서 않 죽으면 좋으련만,마음대로 않되지요.

 

모든 병든자,장애인분은 현대 의학의 가장 적합한 치료 방법과 병행해서 실행 하십시오.

 

인연이 있으면 기쁨이 있게 될것입니다.
정상인 처럼 생활 할수있게 될것입니다.
실행과 극복 없이 기쁨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니 모두에게 꼭 좋은일이 있다고 말씀 드릴수는 없으나,인연있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실행하며 살아 가십시오.

 

늙으면 병들고 고통..

 

나이들어서 질병의 고통과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20代) 정신 차리고 건강을 지키고 살아가야 합니다.

 

단,노력과 극복없이 기쁨은 얻을수 없습니다.

 

고난 없이 영광 없습니다.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그냥 살다가 죽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않하고 살아도 됩니다.

 

안 먹고 사는 사람은 물에 안 앉아도 됩니다.

 

그러나,

 

대단히 잘난 당신이 죽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다면,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그냥 살다가 죽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물에 앉는것을 실행 하고 살아가십시오.

 

먹고 사는 사람은 물에 앉으며 살아야,건강을 지키고 살아갈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자신 건강을 지키고 살면,돌아 댕길 일도 없고,돌아 댕기질 안으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질 보물창고 단양..확인된 석회암 동굴만 181개
https://blog.daum.net/mbbbk/7969341 (클릭)

 

"그냥 사라지고 싶다"..칼 라거펠트, 유지 따라 장례식 없이 화장
https://blog.daum.net/mbbbk/7968682 (클릭)

 

 

원시시대도 아니고 종교는 무슨 종교?

 

종교라는것은 없습니다.

 

종교가 선량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가게 하는 범죄를 저질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종교는 잘 이해 되지 못한것을 모르고,잘 이해 된것으로 알고 믿고 있는 것이며,오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관습화 하여 문화 화 하고 우리 일상 생활에서 행 하여진 것이기에,선입관,판단력의 부족,사고력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고 종교에 빠져 살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뇌腦는 종교,어떤 사상이나 주의,신념 등을 머릿속에 주입 하거나 또는 받아들이면,입력 돼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종교가 잘 이해 되지 못한것을 모르고 잘 이해 된것으로 알고 믿고,오랜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관습화 하여 문화가 되고 일상 생활에서 생활에 일부가 되어,선입관,판단력의 부족,사고력의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무비판적으로 받아 드리고 종교에 빠져 살다 죽어가고 있다.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종교를 버리고,건강을 지키며 살아야,잘난 너 죽음을 벗어나 너가 살 길 인것입니다.

 

 

보통 대장 용종은 50대 이상 남성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변정식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대장 용종은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그 발생 빈도가 늘어난다"며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성별에 따라 발생률에도 차이가 나는데 남자가 여자보다 1.5~2배 정도 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어 그는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상이 없고 특별한 질병이 없는 건강한 40대 10~20%, 50대 20~30%, 60대 이상부터는 30~60%까지 선종성 용종이 발생한다"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나이들면 누구도 외로움,질병,늙음,죽음에서 벗어날수 없고,벗어나려면 젊어서부터 건강 지키며 살아 가야 합니다.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앉아만 계십시오(좌욕).

건강을 지킬수 있습니다.오전,오후30분이상 매일 실행 하십시오.

 

"40대 이하의 젊은 연령층에선 매우 드물며 40-50대에서 빈도가 높아진다"고 밝혔다.

 

젊어서부터(20代) 건강을 지키며 살아야,40-50대에서 질병의 고통과 죽음의 불행에서 벗어나 살아 갈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 진리의 성령이(메시아)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죽음)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장래 일(죽음)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지금은 잘난 너 사느냐? 죽느냐?

 

살까 죽을까를 잘난 너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시간입니다.

 

눈을 밝게 뜨고 보고,바른 판단을 해야 살길에 들어섭니다.

 

잘난 너 사느냐,죽느냐는 네가 선택하고 결정 한대로 이루어 질것입니다.

 

군포 철쭉동산

연합뉴스
만개한 군포 철쭉동산 2년만에 만난다..23일부터 개방
김인유 입력 2022. 04. 21. 10:44

https://news.v.daum.net/v/20220421104405637

 

https://tv.kakao.com/v/428180823

화면 클릭

 

잘난 너 저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살아 갈려면 건강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난 너 건강을 지키고 살아 가는것을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서산 마애삼존불상

 

중앙의 본존상(석가 여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주를 든 보살입상(연등불)이, 왼쪽에는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미륵부처)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연화대 위에 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 얹고 가볍게 숙인 얼굴을 오른손으로 괸 모습의 불상

 

 

예술 작품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우리들에게 전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은 선지식인분께서 우리들에게 보고 깨닫고 살아가는 메세지를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잘난 너 "앉으며" 살아 가라는분이 "미륵 부처님"이시니,이 분 말씀을 찰떡같이 알아 듣고,잘 따르고 살아 가라는 메세지를,선지식인분께서 저렇게 "반가사유상 半跏思惟像" 조형물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타임캡슐 인것입니다.

 

★ 미륵부처님의 증표 

물의나라 (daum.net)(클릭)

 

쌍무지개.. 핑크빛 석양.. 서울 희귀 기상현상 속출 이유

물의나라 (daum.net) (클릭)

 

 

회암사 하면 절로 웃음이 터져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양녕대군의 ‘살아서는 임금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 이야기다.

 

양주 회암사터. 효령대군이 머문 사찰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들판에서 잡아온 짐승들을 절간에서 굽자 효령대군이 “절간에서 무슨 짓이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은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느냐”고 응수했다.|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 제공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기운이 있을때는 네 멋대로 하고 잘나가고 네가 왕이나,세월가면 저승 가는것을 깨닫고 살아가라는 메세지를,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건강을 지키고 살아 가는것을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미륵 배상!

 

※ "저작권침해"소지시 연락주시면 삭제 하겠습니다.